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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35년👑 인종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고려 인종 시기, 이자겸의 난 이후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들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 정책을 주장하며 현실 안주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는 국가의 자주성과 활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경(西京, 현 평양)을 기반으로 한 세력은 개경 귀족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며 새로운 정치적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특히 승려 묘청과 정지상 등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개경의 지덕이 쇠퇴했으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서경은 고구려의 옛 수도로서 북방 진취성을 상징하는 곳이었고, 이들은 금나라 정벌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을 꿈꿨습니다. 인종은 한때 이들의 주장에 솔깃하여 서경 천도를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1135년(인종 13년), 묘청, 정지상, 백수한 등은 서경에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천도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개경의 김부식(金富軾) 등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대로 천도 계획이 좌절되자, 묘청 등은 서경에서 '대위국(大爲國)'을 선포하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묘청은 스스로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며 금나라 정벌과 개경 세력 타도를 주장했습니다. 인종은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반란 진압을 명했고, 김부식의 고려군은 서경을 포위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초기에는 묘청 세력이 선전했으나, 점차 전세가 불리해졌고, 결국 1136년 김부식에 의해 서경이 함락되면서 묘청 세력은 진압되었습니다. 정지상 등 주요 인물들은 김부식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고려 사회 내부의 보수적 문벌 귀족 세력(개경파)과 진취적 자주 세력(서경파) 간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 난의 진압으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문벌 귀족 세력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고, 금나라에 대한 사대 정책이 확고해졌습니다. 반면, 서경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북방 진출의 기상은 꺾였습니다. 이는 이후 무신정변의 배경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이를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으로 평가하며,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사상의 대결로 해석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의 대외 정책 방향과 내부 권력 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